구조와 구조의 사이를 유영하는 한무권의 퍼포먼스
인터뷰를 위해 작가 한무권을 만났을 때, 그는 핵발전소를 처음 방문했을 때 들었던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핵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물과 공기는 불순물이 전무한 ‘순수한’ 물과 공기라는 말이 상당히 흥미로웠다는 것이다. 도도한 예술의 역사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막연히 그 실체를 찾기 위해 일생 분투했을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순수’가 아니던가. 여전히 잡히지 않는 그 개념적 대상을 산업 현장에서는 이미 물과 공기를 정화하여 구체적인 제조 과정의 첨가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풀리지 않는 개념적 실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여 이미 구체적인 무엇으로 생산해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산업적 사유와 방법으로 추상적인 개념적 지평에 근접하는 그 역동성과 능동성은 작가에게 중요한 사유의 영감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 한무권은 그러한 경험을 기초로 산업적 재료와 기법을 활용하여 순수한 공기의 흐름을 표현하는 신작을 선보였다. 공기정화기를 거쳐 정화된 (순수한) 공기가 투명하고 밀폐된 배관을 타고 이동하여 중간에 있는 수조에 거품을 내고, 다시 압축기에 비축되었다 관람자가 발로 조작하는 스위치를 통해 트럼펫을 비롯한 세 개의 관악기를 통과한다. 그 공기는 각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보이지 않지만 엄존하는 존재성을 드러낸다. ‘순수’라는 궁극적이면서도 모호한 이 개념의 비가시적 실체를 일련의 흐름을 거쳐 조음의 형식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한무권의 작업은 제조산업의 요소들을 차용하여 동시대 미술이, 혹은 작가라는 존재가 추구하는 지향점의 비가시적 실체를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또 다른 신작은 이번 전시가 열리는 시점에 우리들의 일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대한자신의 사유를 표현한 것이다. 일식이나 월식때 해나 달 주변에 생기는 광환을 가리키는 말인 코로나는 원래 라틴어로 왕관을 의미한다고한다. 그는 작은 램프들이 연결된 가는 전기줄로 마치 가시관을 연상시키는 모양의 왕관을 만들어 공중에 거치하고 그 아래 작은 악세사리왕관을 연결하여 걸어두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고대에 왕관을 대체하는 월계수 한 그루를 배치해두었다. 보이지 않는 전기의 존재는 점등된 램프로 확인되고, 왕관이 갖는 역사적 권위는 대량 생산되어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모형 왕관과 은유적 존재로서의 월계수를 통해 환기되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가의 신작이 현장 중심의 설치작품이라면 그 외에 전시장 전체에 고르게 퍼져있는 평면과 설치 작품들은 이전 두 차례의 전시에서 선보인 적 있는, 핵발전소와 방사능 폐기물장에 관련된 다수의 작품들이다. 전체를 보면 이번 전시에 등장한 신작들이 핵발전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해석들을 보여주는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수년간에 걸쳐 진행한 작가의 리서치와다양한 종류의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기술하기에 이 지면은 한계가 있다. 전시장 입구에 배치된 영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많은 리서치의 결과들과 관련된 이미지들, 그리고 작가의 수행적 행위들과 그 작가가 최근 한 주제에 천착한, 만만치않은 작업의 두께를 보여준다. 이 복잡한 과정들을 조망하기 위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가진 세 가지의 단계를 구분해주었다. 이를 참고하여 전체 작업을 세 단계로정리해보면 제반 작품들이 보다 용이하게 정리된다. 우선 자연상태에서 원래 존재하던 비가시적 에너지인 전기를 가시화시키는 작업들이다. 번개와 벼락이 치는 장면을 보여주는 사진작업이나 핵발전소 내부를 흐르는 전류를 표현하는 드로잉 작업들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발전의 제반 과정들에서 도출된 오브제나 방법론들을 새로운 조음의 과정으로 치환시키는 일련의 행위들이다.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이 과정은 주로 기록 사진과 영상을 통해 드러난다. 마지막은 이러한 태도와 과정을 통해 조음된 소리들이다. 이것은전시장에서 실제 악기와 오브제가 결합된 설치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전시장의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단계는 언뜻 이 전시의대부분을 차지하는 익숙한 조형요소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록으로 남아있는 작가의 일련의 ‘행위’들이다. 한무권 작업의 제반 정체성은 비가시적 존재와 그것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다른 차원으로 변환시켜 표현하는 다양한 행위들에서 주로 형성된다. 이를 일종의 수행적 퍼포먼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의 선택 이면에는 지금은 뉴욕으로 이주한 작가가 나고 자란 경주 지역과 부근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핵발전 관련 시설들에 대한 중층적 인식이 존재한다. 고대 동아시아의 찬란한 역사를 대표하는 고도로서의 문화적 배경이 작가의 성장과정에 자리잡은 기억과 사유의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며, 여기에 오늘날 핵발전을 둘러싼 현실의 무게로 상징되는 동시대 문명의 엄밀한 현존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이 중층성은 한무권이 제시하는 다양한 사유의 핵심이다. 과거와 현재, 보존과 개발, 혹은 생태적 가치와 수단적 효율성 등 복잡한 동시대사회의 패러다임 사이에서 한무권은 분명한 선택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모호성과 복잡성 사이를 유영하듯 가로지르며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산업적 재료를 미학적 오브제로 변환시킨다거나 물리적 현장을 거대한 퍼포밍의 장으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중층적 사유의 장에서 관객이 익숙한 사유구조를 버리고 대상과 사안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사유해볼 것을 제안한다. 마치물과 공기의 불순물을 완벽하게 제거하여 핵발전의 재료로 활용하는 방식으로부터 ‘순수’라는 미학적 원형에 대해 재사유해보는 것 처럼 말이다.
고원석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
Wonseok Koh, Chief curator, Seoul Museum of Art